비 망 록

일본에 주자학을 전수한 강 항 선생

강춘권 2015. 12. 17. 10:49

 

 

일본에 주자학( 朱子學 )을 전수한 강항 ( 姜沆 )

2005년은 한일우정(韓日友情)의 해이며 한일수교(韓日修交) 40주년을 맞는 해 이기도 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새해벽두부터 주한 일본대사인 “ 타카노 토시유키 ”가 감히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에서 “ 다케시마( 독도 )는 일본땅이다 ”고 지껄인 망발을 시작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는 일본의 교과서 역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등 일련의 사건들은 일부 우익세력과 지자체(시마네 현)의 소행이라고는 볼 수 없는 아주 조직적이고 범 정부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 하여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특히 “ 국가의 백년지대계는 교육에 있다 ”라는 말이 떠올라 소름이 돋는다.

끝없이 주변국을 침탈하며 전쟁을 일삼던 섬나라 일본, 손으로 하늘을 가리면서 태연자약하고 뻔뻔한 왜놈들속에서도 우리 선조들, 그것도 이 지역 선비에 의해 눈과 귀를 뜨고 제대로 배운 양심있는 후예들은 자국의 형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기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일본의 장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에게 선배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감춘 새로 만든 역사를 교육시키겠다는 우익세력들의 음모를 잠재울 수 있겠는가.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기틀이 잡힌 일본, 차제에 세상을 칼로 지배하려던 무식한 섬사람들에게 공자와 맹자를 가르치고 포로의 신분으로 무사정권에 항거한 영광사람 수은 강 항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주자학자 수은( 睡隱 ) 강 항 ( 1567 ~ 1618 )선생은 조선왕조 때 저명한 유학자의 가문인 사숙재 희맹( 私淑齋 希孟 )의 5세손이며 연산조 무오사화(1498년) 때 점필재 김종직을 숭상하였다 하여 영광으로 유배, 진주 강(姜)씨 영광시조가 되신 사평공 학손의 4세손이다.

선생은 7살 때 “ 맹자 ”7권을 암송했고, 시를 뛰어나게 잘 지어 16살에 향사가 되고, 22살 때는 과거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29살에는 박사가 되었으며 조정의 공조와 형조에서 좌랑을 지냈다.

고향에 내려와 있던 선생은 선조 30년(1597년)에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전쟁(정유재란)이 나자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부임하여 의병을 모으기 위해 격문을 들고 동분서주하던 중 영광이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과 함께 배를 타고 이순신 장군이 있는 통제영으로 향하다 왜병 “ 토우도우 타카도라 1556~1630 ”군사들의 포로로 잡혀 일본 시코쿠 땅의 오오츠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일본의 포로생활이 시작되었고 1년쯤 되었을 때 탈주를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우와지마 섬 성문에다 붓글씨로 “수길의 조선 침입은 천인이 함께 용서치 못할 폭거이므로 어김없이 천지의 노여움을 살 것이로다 ”라는 격문을 써 붙였다가 붙잡혀 참수당할 위기에까지 처했으나 일본 학승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오오츠 땅으로 호송된다.

그곳에서 강 항 선생은 쿄우토 사람인 후지와라 세이카( 1561~1619)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일부 박사가의 독점물에 불과하던 종래의 유학을 개방화시켜 대중화한 에도유학의 창시자 “ 후지와라 세이카 ”는 본래 쇼우코쿠치 사찰의 중이었으나 환속하여 명나라로 건너가 유학, 주자학을 공부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이다.

그 와중에 토우도우 번주에 조선 포로인 유학자 강항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을 찾아가서 학문을 가르쳐 달라고 엎드렸다.

그 당시 한슈우 타쓰노의 번주인 아카마쓰 히로미찌는 37세 였고, 후지와라 세이카는 38세 강 항 선생이 32세 였다. 손위의 나이에다 신분이 드높은 번주인 대 학자 다이묘우(영주의 칭호)가 조선인 포로, 그것도 나이 어린 강항에게 배운다고 무릎을 꿇는 것은 보통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포로의 몸으로 온갖 굴욕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일본인인 그들이 열성을 다하여 주자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며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집념을 알게 되자, 드디어 마음을 열고 은수를 초월하여, 주자학의 의미며 자구를 풀어가면서 사서, 오경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599년 2월15일에 일본의 사서오경 훈독의 기본이 되는 “ 사서오경(四書五經) 왜훈(倭訓)이 완성된다.

임진왜란 이후 “토쿠가와” 막부가 문치를 표방하면서 그 정신적 지도이념을 주자학에서 구했고 그 과정에 강 항 선생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이책을 기본으로 주자학을 널리 설파하였고 “ 일본, 종유(宗儒)의 의(義)를 외치려는 자여, 이 책을 가지고 원본을 삼으라 ”고 자신만만하게 쓸 만큼 감동했다고 한다.

강 항 선생은 저서 “ 간양록 ”을 통해 2년 8개월 동안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은 물론 일본의 여지, 관호, 군세, 형세 등을 기록하여 선조에게 소(疏)를 올린 “ 적중봉소 ”가 담겨있고 “ 적중문견록 ” 즉, 왜국백관도, 왜국팔도육십육주, 임진,정유에 침략해온 왜장의 수요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굴하지 않고 배우려는 자의 눈과 귀를 뜨게 해주고, 일본의 정세를 담은 중요한 정보자료를 조정에 보내줌으로서 민족적 자부심과 문명의식을 확고히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땅에 건너가 왜나라 왕자들에게 글자와 글을 가르쳐 주면서 추앙받게 된 발자취를 역사학적으로 밝힌 역사학계의 태두 “ 우에다 마사야키 ”박사의 고뇌와 제2 왕인 선생으로 일컬어지는 수은 강 항 선생의 눈부신 발자취를 탐구하여 자랑스럽게 발표한 일본 교우토 교육대학 강사이며 사학자인 “야마자키 야스마사”등 일본의 양심 세력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 역사왜곡은 일본사람 모두의 무식함을 굳이 감추려 하는 추태요,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문화의 눈을 뜬 미개했던 섬사람들의 열등감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주변국들의 규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의 장래를 짊어 질 후학들에게 자국에 유리한 왜곡된 역사를 차근차근 가르치려는 의도는 분명 피가 끓고 통분할 일이지만 자매 결연지의 지명을 따 만든 센다이로를 빛고을로 로 도로 명칭을 바꾸고, 어느 사회단체의 시위 구호처럼 사쿠라는 일본 국화니까 모두 잘라내야 한다 고 해서 왜놈들의 버르장머리가 고쳐지겠는가.

서울에서 일본을 규탄한다는 시위 군증들이 메이드 인 저팬의 mp3를 귀에 꽂고, 이를 취재하기 위해 나선 기자들의 손에는 하나 같이 니콘카메라가 들려있더라는 일본의 대표적 우익세력인 산케이나 요미우리 신문의 비아냥 섞인 기사가 왜 이렇게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2005년 영광21 에 기고한 강 항 선생의 발자취..........

 

강항 선생을 기리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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