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망 록

42년만의 첫 만남

강춘권 2013. 7. 2. 19:28

 

 

 

하얀 도포자락 펄럭이며 한 손에 낡은 소고를, 그리고 한 손에는 자그마한 소고채를 들고 미끄러질 듯 흐느적거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도도한 물결이 파도치듯 격랑 속으로 파고들어 휘몰아치다가 이마의 구슬땀을 슬쩍 훔치며 어깨춤 덩실대는 어느 촌로의 춤사위.

소고춤이 끝나고 막걸리 한 사발에 목을 축인 후 흥이 깨질세라 장구잡이 두사람을 앞에 놓고 쇠를 잡고는 밀고 당기고 돌아가며 신명난 굿 한 판으로 구경꾼들의 넋을 빼놓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촌로의 뒷모습을 쫓는데 " 아빠 일어나세요 ! " 라는 아들놈의 성화에 못 내 아쉬워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그날.

좀더 꿈속에 남아 있었으면 가까이서 그분을 만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 그래, 오늘은 만날 수 있다 " 라는 기대감으로 기분 좋은 아침을 맞았던 것 같다.

작업할 인부와 함께 오른 차 안에서 살며시 눈을 감고 지난 밤 꿈을 생각하며 그분을 그려본다.

그분을 꿈속에서 만날 때는 항상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하얀 도포자락 펄럭이며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춤을 추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던 것 같다.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서 였을까, 아니면 기억해 낼 수 없는 모습이어서 일까.   끝내 제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시다니 !

" 남수 !  그 양반 참말로 신명났제, 선수마당에서 한바탕 굿이 벌어질라치면 동네 사람들이 남수다 ! 남수여 ! 하고 모여들곤 했슨게 , "

" 그 양반이 소고춤을 추면 참말로 학이 춤을 추는 것 같었당게 "

" 그 양반이 깽매기를 잡고 판을 휘어 잡으면 엉덩이를 붙이고 땅바닥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제, 어찌나 신명나게 노는지 지금도 그 깽매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먼 ! "

칭찬인지 흉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을 아는 어르신들의 하나 같은 얘기다.

그분에 대한 얘기를 숱하게 들은 나는 가끔 그분의 환영을 꿈속에서나마  뵐 수 있었지만 어찌 그것으로 내 어린시절, 아니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마음을 달랠 수 있었겠는가.

" 자! 시작합시다. "

이장을 하기 전, 모시기 위한 모든 절차를 끝내고 인부들에게 조심히 다룰 것을 당부한 후 한삽 한삽 떠내려가는 지점을 응시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 시켜본다.

" 잠간만요! 거기서 부터 제가 하겠습니다. "

거의 다다른 지점에서 함부로 하는 것 같은 인부들의 손놀림도 거슬렸지만 그보다는 직접 그분을 내 손으로 모시고 싶었다.
나는 준비한 한지를 옆에 가지런히 놓고 몇 개의 붓을 들고 내려가 비록 차가운 기운이지만 싫지 않았고 조심스레 그분의 몸을 취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탓일까, 하기야 한 번 옮겨졌던 자리이고 4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야 어찌 온전한 그분을 뵈올 수 있겠는가.
취할 수 있는 그분의 몸을 정성을 다해 거두고 웃고 있는 듯한 그분의 얼굴을 두 손 위에 받쳐 들었다.
앙상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당신을 앞에 하고도 마치 온기가 있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니 이것이 핏줄이라는 것이구나!

" 그래요! 얼마나 보고 싶고 불러보고 싶은, 그리고 안기고 싶었던 당신인줄 아십니까?
제가 바로 당신이 이제 막 첫 돌이 지난 피붙이를 놔두고 저세상으로 떠나셨던 막내랍니다.

젊은 나이에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두고 당신인들 떠나고 싶었겠습니까만, 제가 바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에 품에 안고 찍었다던 당신이 유일하게 남기신 사진 속의 막둥이랍니다.

당신의 모습이야 낡은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 한 점뿐, 당신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는 제가 이렇게 당신을 앞에 하고 42년 만에 상면을 하고 있답니다.

아버님 !

지금 당신과의 이 입맞춤, 그리고 비벼보는 따스한 볼, 안기고 싶었던 당신의 가슴이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웠는지 당신은 아십니까?

실로 내겐 42년 만의 상봉이었다.
어린 시절이야 홀로 되신 어머니와 열한 살 터울인 큰형님이 아버지 노릇 다하셔서 외로움 모르고 자랐지만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했던 자리였는가를 피부로 느끼면서 원망하고 그리워했던 아버지다.

가족묘지를 만들어 따로 계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모시기 위한 이장을 했을 때, 내가 고집을 피워 작은형님 대신 멀리 계셨던 아버지를 모시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렇게라도 아버님을 뵙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짜릿한 전율 같은 것을 느꼈던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나 잊을 수가 없다.

앙상한 유골이지만 내겐 살아 움직이는 듯 했고 " 아버님, 제가 막냅니다 " 하면서 입맞춤하고 볼을 비빌 때 함께 눈시울 적셔준 일행들이 새삼 생각난다.

- -  위 글은 2000년 MBC 여성시대 신춘편지쇼 에서 " 내인생의 첫번째 이야기 그리고 사진 " 이라는 글제로 응모하여 입선한 저의 글입니다.
      선친께서 남기신 저와 함께 찍었던 유일한 아버지의 작은 사진이 너무 낡아 코팅하여 제 지갑 속에 보물처럼 간직하며 삽니다. - - - - - - - -